20세기 전기목록 – 제2장 (1)

교토 후시미에 있는 이나리 산에는 장사의 번영을 관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나리 신사가 세워져 있다.
본전은 기슭에 서 있지만 산 깊숙한 곳까지 말사[1]와 오쓰카[2]가 뒤덮고 있다. 메이지 40년(1907년) 현재까지도 신사나 오쓰카에 깃든 신령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서 숭배하는 ‘오쓰카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다.
참배객이 오르내리는 길은 오쓰카와 신세키[3]를 누비듯이 뻗어있고 붉은 도리이가 무수히 늘어서 있었다. 등산로라고 해도 될 만큼 가파른 길이지만, 모모카와 이나코는 8월의 맹더위를 견뎌내며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감색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기모노 위에 유채꽃 색 오비를 맨 이나코가 걸어갈 때마다 쥐와 쌀가마니 모양의 장신구와 땋은 머리가 함께 통통 튄다. 매미 우는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오쓰카와 말사에서 축문을 읊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산 속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이나코의 나막신 소리가 딸깍딸깍 울려퍼진다.
중턱에 있는 요쓰쓰지부터 긴 계단을 올라 촘촘히 모여있는 오쓰카와 우거진 숲을 지나면 마침내 트인 장소에 도착한다. 이곳에 서면 가모가와 강를 가로지르는 간진바시 다리, 그 위를 달리는 교덴[4] 전차, 후카쿠사의 보병 제38연대 병영, 그리고 시치조 정차장까지 모두 보였다.
바로 이 풍치 좋은 곳에 아쿠비 다이묘진이라고 불리는 신을 모신 오쓰카가 세워져 있다. 민낯을 드러낸 바위 낭떠러지에 새전함과 불상을 안치해놓은 대좌가 딱 붙은 모양새로 만들어져 있고, 대좌에는 크고작은 도리이와 제물이 봉납되어 있다.
오쓰카와 마주한 이나코는 새전을 넣은 다음 몸을 굽히며 박수를 치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음에는 부디 일이 잘 풀리게 해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합장한 손을 마치 불이라도 지피려는 듯 문질렀다.
“게으름 피우지 않게 해주세요. 다음에는 부디 아버지께 혼이 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 연습하고 있는 삼현금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어서 언니처럼 미인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또…….”
기도가 얼추 끝났는지 이나코는 이어서 큰 액운을 막는다는 오하라에의 축문을 읊기 시작햇다.
“천상의 나라에 진좌하시는 황조신의 명령을 좇아……”
초가 타는 향이 주변을 맴돌고, 매미 우는 소리와 초목이 스치는 소리에 스스로의 목소리가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자 이나코는 떠들썩한 삶에서 벗어난 이곳이야말로 신이 머무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풀어져갔다.
어디선가 이나코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신령스러운 음악 연주가 들려왔다.
이나코는 축문을 읊으면서 이 주변에 신을 위한 연주를 하는 신사가 있는지 둘러봤지만, 이상하게도 연주가 들려오는 곳은 꼭 암벽 위의 수풀인 것 같았다.
이나코가 고개를 들자 동시에 음악이 멈추고 ‘앗’하는 얼빠진 소리가 들렸다.
암벽 위에서 수풀이 심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떤 소년이 기세 좋게 굴러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면서 낙하하는 소년은 엉덩이로 봉납되어 있던 도리이를 화려하게 어질러놓은 후에야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끙끙대는 소년의 가슴에는 상자 모양의 기계가 안겨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던 이나코가 설마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드디어 신령님이 내려와주셨구나……!”
얼굴이 점점 환해지더니 이윽고 손을 모으고 소년을 향해 필사적으로 절하기 시작했다.
“아쿠비 다이묘진 님, 아쿠비 다이묘진 님, 부디 저의 원하는 바를……”
“바보냐.”
소년이 기계에서 꺼낸 나팔처럼 생긴 부품으로 소원을 비는 이나코의 머리를 경쾌하게 두들겼다.
“아얏,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도움은 못 줄 망정 웬 소원을 빌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이나코가 소년을 유심히 관찰했다. 붓질 무늬가 있는 무명 천 안에 셔츠를 입고 주름잡힌 하의를 입은 모습은 평범한 소년 그 자체였다. 이제야 상황을 알아챈 이나코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 믿음이 전해져서 신께서 나타나신 줄 알았어요.”
“뭘 잘못 먹어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나팔을 기계에 돌려놓았다. 이나코가 그 모습을 아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자 소년이 “너 축음기 처음 봐?”하고 물었다.
소년은 대좌에 축음기를 내려놓고는 옆면의 손잡이를 잡고 태엽을 감았다. 끝까지 돌리자 가운데 눕혀진 채 고정된 통이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팔――나팔관이라고 부른다는 것 같다―― 끝에 붙은 뾰족한 바늘을 통에 가져다 댄 순간, 신령스러운 음악이 나팔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전 들렸던 그 음악이네.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서 소리가 나온담.”
소년은 축음기를 멈추고 대롱같이 생긴 통을 꺼내 이나코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납관이라고 하는 거야. 겉에 가느다란 홈이 파여있는 게 보이지? 거기에 바늘을 가져다 대면 바늘이 떨리면서 녹음된 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거야. 곡이 들어있는 납관이니까 이거 하나만 해도 거의 1엔 정도 될 거야.”
가격에 놀란 이나코의 손에서 납관이 미끄러져 내렸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소년이 낚아채며 “바보야, 떨어뜨리지 말란 말이야”하고 초조한 얼굴을 보였다.
“죄, 죄송해요. 그래도 놀라는 게 당연하지, 그 정도면 교덴을 백 번은 탈 수 있는 돈인데.”
“그래도 접시 모양인 것보다는 값이 싸. 게다가 납관만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도 있어.”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또 다른 납관을 꺼내 축음기에 끼웠지만, 전과는 다르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 안 나네, 고장인가?”라고 이나코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소년이 바늘을 맨 처음 위치로 돌려놓았다.
‘소리 안 나네, 고장인가?’
축음기에서 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하는 이나코를 보며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누구라도 쉽게 녹음할 수 있다는 게 납관 축음기의 장점이야.”
“굉장한 기계가 있구나. 그런데 왜 그런 걸 들고 돌아다니는 거죠?”
“이 주변에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 축음기를 수리해달라고 부탁 받았거든. 그래서 가져다 주기 전에 오쓰카 위에서 시험삼아 한 번 돌려본 거야. 그런데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떨어졌지 뭐야.”
“아, 그래서 아까…….”
그렇게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이나코는 마침내 도리이와 제물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 이런 천벌 받을 일이 있나!”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이나코에게 소년은 “천벌?”이라며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손잡이가 있는 덮개를 씌우고 축음기를 손에 들고 있던 소년이 이나코에게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안타깝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믿지 않는 사람이야.”
이나코는 돌아서려는 소년의 허리끈을 재빨리 잡아채고 땅 위에 널브러진 도리이를 가리켰다.
“믿든 안 믿든 어질러놓은 사람이 정리해야죠.”
얼굴을 찡그린 채 소년은 도리이와 물건들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오쓰카를 향해 합장했다.
――그래도 배례는 제대로 하는구나. 의아해하던 이나코는 소년의 눈빛을 보고는 숨이 멎었다.
소년은 손을 모은 채, 증오하는 눈으로 오쓰카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소년은 허리를 굽히지도 않은 채 오쓰카에서 발을 돌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럼 안녕”이란 말을 남긴 채 떠나갔다.
정신이 돌아온 이나코는 오쓰카에 대고 방금 전 소년의 불경스러운 행동에 용서를 구하고 급히 축문을 이어 읊기 시작했다.
“대왜일고견국을…….”
소년의 사나운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탓이었을까. 완벽하게 암기했을 터인 축문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억해내려고 하던 그 때,
“대왜일고견국을 평안한 곳으로 만드시고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년이 축문의 다음 부분을 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이나코를 놀리듯 흘겨보더니 다시 떠났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람!
아쿠비 다이묘진에게 참배를 마친 이나코는 입을 삐죽이면서 길을 내려갔다.
오쓰카를 어지럽힌 데다가 믿음까지 없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다니.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이나코가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사이 숲을 빠져나와 나무 울타리가 길가에 늘어선 기슭에 도착하자,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구걸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의 흰 옷 밑에 보이는 다리는 한 쪽 밖에 없었다.
이나코는 구걸하는 사람 앞에서 멈춰 서서 “실례지만 혹시 왼쪽 다리는…….”하고 물었다.
“러일전쟁에서 잃었습죠.”
예상한 대로, 이 사람은 ‘폐병’이라고도 불리는 러일전쟁의 상이군인이었다.
“이 근방이면 혹시 제4사단에 있으셨던 분인가요?”
“맞습니다. 삼 년 전, 203 고지를 향해 총공격을 하던 날 에 적의 포탄이 근처에 떨어져 터지는 바람에…….”
전쟁터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끝 부분은 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나코는 망설임 없이 동전 한 닢을 돈주머니에서 꺼냈다.
“큰 돈은 아니지만 받으세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이나코의 동전에 손을 뻗으려다 갑자기 “끄아악”하며 괴성을 질렀다.
기겁한 이나코 앞에서 그가 몸을 비틀더니, 분명 있어서는 안 될 왼쪽 다리를 울타리 속에서 쑥 하니 내밀었다. 그는 그의 발목에 붙은 지네를 보고 얼어붙은 이나코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황급히 길을 뛰어내려갔다.
거지가 서 있었던 울타리를 보니하니 아래에 다리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에 발을 숨겨서 다리 한 쪽을 잃은 사람처럼 속였던 건가?”
“당연하지, 이 바보야.”
들여다보고 있던 구멍 너머로 순간 나타난 얼굴에 이번엔 이나코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구멍 너머에는 좀 전에 만났던 그 소년이 웃으며 담을 가볍게 넘어 왔다.
“제4사단은 203 고지 따윈 가지도 않았어. 그걸 또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고 있다니.”
“너는 아까 그…….”
“축음기 가져다 주고 돌아가던 길에, 누가 봐도 수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푹 빠져 듣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말이야. 마침 지네가 보란듯이 앞을 기어가고 있길래 따끔한 맛을 보여 줬지.”
방금 전 지네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어릴 적 지네에게 물리고 나서 그 이후로 지네는 쭉 싫어했다.
“그건 그렇고. 퇴치해준 보답은 충분히 받아야겠어.”
이나코는 자신이 들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내려다보고는 입을 씰쭉대는 소년에게 주저없이 내밀었다.
“1전 뿐이지만 받아.”
이나코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소년은 쩔쩔매며 “농담을 진담으로 받지 마”라고 말했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속아 넘어갈 뻔한 걸 도와줬으니까 받아.”
“그래도 1전은 너무 많이 주는 거잖아.”
“그럼 이건 신에게 바치는 새전이라고 생각해. 장난치기 좋아하는 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끈기에 못 이긴 소년은 마지못해 1전을 집으면서 “고마워, 그런데 이름이…….”라고 갸우뚱했다.
“나? 나는 모모카와 이나코야.”
“……메뚜기[5]?”
“이나코!”
이나코는 소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앗, 갑자기 무슨 짓이야, 예의 없이.”
“아까부터 예의 없던 사람이 누군데. 넌 그래서 이름이 뭐야?”
소년은 눈꼬리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씩씩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사카모토, 키하치.”
***
돌아가는 방향이 같았기에 키하치라는 소년과 함께 길을 내려가기로 했다.
키는 이나코보다 조금 더 컸고, 같은 15살이었다. 오쓰에 있는 어느 절에서 태어나, 친척이 운영하는 가게 일을 도우며 교토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고 지금은 여름 방학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방금 전의 납관 축음기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이나코가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본 키하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디슨을 모른다고? 발명의 신인데.”
“앗, 신이라고? 어떤 은혜가 있는데? 어디서 참배하면 되니?”
“갑자기 죽은 사람 취급 하지 마. 미국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
이나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 미국이 있을 방향으로 몸을 틀어 합장을 했다.
“뭐 하는 거야?”
“일단 빌어놓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건 오토코야마 하치만구[6]에서나 하는 게 어때. 에디슨이 옛날에 그 주변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가져다 백열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들어서 대성공 했다고 하니까.”
“필라…….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뭔가 받을 수는 있을 것 같네. 다음번에 참배하러 가봐야지.”
“‘일이 잘 풀리게 해주세요’라고 빌려고?”
키하치가 쓴웃음을 짓자 의욕이 넘치던 이나코의 낯이 뜨거워졌다. 좀 전의 기도가 그대로 들렸던 모양이다.
“……오늘 같은 실패를 또 하게 되면 그렇게 빌 수도 있어.”
이나코는 후시미에서 일본주를 담그는 모모카와 양조장 집안의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진에몬은 옛 무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람으로, 이나코는 어렸을 적부터 다양한 예의범절과 다방면의 것들을 철저히 배워야만 했다. 언니가 어려움 없이 배워나가는 한편, 무얼 해도 어벙한 성격의 이나코는 매일같이 실수를 일으켰고 그 때마다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지곤 했다.
특히 심했던 것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저녁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올 예정이라서 가족이 총출동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나코는 ‘파리 잡는 그릇’이라고 하는 석유가 들어있는 작은 놋 대야를 이용해서 파리를 잡으러 열심이었는데, 그러던 중에 다른 용건이 생각이나 잠시 복도에 대야를 두고서 자리를 떠나고 만 것이다.
그 직후에 복도에서 누군가 크게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며 돌아와보니 홀랑 뒤집어진 놋 대야와 파리 가득한 석유를 머리에 뒤집어쓴 진에몬이 도깨비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호통치시고는 ‘청소할 거리가 더 많아진다’면서 날 쫓아냈어.”
옆에서 키하치가 쿡쿡대며 웃고 있었지만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 큰 길에 도착했다. 길가의 선물 가게에는 이 지방의 명물 후시미 인형이 죽 진열되어 있었고, 빙수와 감주를 파는 가판대도 늘어서 있었다.
키하치는 출출했는지 종이에 싼 비스켓을 하나 집어 앞니로 깨작거렸다. 이나코에게도 하나 먹겠느냐고 물어왔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질이 영 좋지 않은 값싼 음식이었기에 거절했다.
“메뚜기 씨가 그 오쓰카를 참배하러 간 걸 보니 집에서 아쿠비 다이묘진을 모시고 있는 거 맞지?”
“아냐. 우리 집의 오쓰카는 고젠다니야. 내가 아쿠비 님의 오쓰비를 찾아가는 건……. 믿음을 인정받으면 아쿠비 님이 편지를 보내주기 때문이야.”
키하치는 비스켓을 깨물다가 얼굴이 굳어지며 이나코에게서 조금 거리를 뒀다.
“아하……. 그래……. 그런 신기한 일도 있구나.”
이나코를 바라보는 눈은 연민을 보내고 있었다. 분명 정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짜라니까. 내가 어렸을 때 아쿠비 님이 언니 앞으로 보낸 편지를 본 적 있어.”
“먼 곳에 사는 신자가 기원하는 편지를 보내곤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도 신이 직접 보내줬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걸.”
정말 신께서 보내준 편지가 있었다고 말하며 이나코는 뾰로통해졌다.
“아무튼 아쿠비 님을 참배하러 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야. 게다가 푸념하는 걸 잘 들어줘. 난 영리하지 못하니까 친구도 별로 없고, 그래서 아쿠비 님에게 털어놓으러 가. 새전은 상담료인 거야.”
“신이 네 푸념을 들어준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내 장점이라고는 믿는 것 밖에 없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모습에 키하치는 흐음 소리를 내며 입에 붙은 비스킷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사카모토는 왜 아쿠비 님의 오쓰카에 있었어?”
“집에서 모시는 신이 아쿠비 다이묘진이야. 할머니가 옛날에 수행하면서 내려받은 신이라서.”
이나리 신사에서 ‘오다이’라고 불리는 사람 밑에서 수행을 쌓으면 오쓰카의 신의 힘을 내려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키하치네 집은 절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할머님이 내려받은 아쿠비 다이묘진의 분령을 가두어 놓은 신사가 집안에 있었다. ‘신께서 떠나가니까 절대 열지 말아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기에 키하치와 그의 형은 그 신사를 “열지 못하는 신사”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서 예의상 참배하러 가는 것이냐고 의문스럽게 생각하자 키하치는 웃으며 부정했다.
“전망이 좋거든. 자주 기대어서 도시락 먹기도 하고 그래.”
너무나도 불경스러운 말에 이나코는 더더욱 이 녀석이 싫다고 느꼈다.
교토전기전철 정류장에 도착하자 흰 색과 차 색 우이로[7]처럼 보이는 전차가 하나 멈춰서 있었다. 운행시에 작은 종이 두 번 울리는 이 전차는 교덴의 간판 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앞잡이라고 불리던 소년이 전차 앞을 달리며 ‘전차가 와요! 비켜나세요!’라고 알리며 다녔지만 너무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수 년 전부터 폐지되었다. 대신 이제는 차체 앞뒤로 사고 방지용 구조 그물이 달려 있었다.
“맞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이거 줄게.”
전차에 타려던 키하치는 돌아서서 전단지를 건넸다. 복을 준다고 하는 일곱 신의 그림과 함께 ‘호라이 불구점’이라는 가게 이름이 나와 있었고 ‘기계수리 가능’이라는 문구와 주소, 독특하게도 전화번호도 실려 있었다.
“혹시 기계 제품이 고장났을 때는 찾아와 줘. 첫 수리는 맛있는 비스킷으로 대신 해줄게.”
불구점인데도 기계 수리라니,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자니 출발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고민 거리가 있으면 1전 가지고 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신 대신 내가 들어줄테니까.”
키하치는 농담처럼 말하고는 천천히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 올랐다.
“또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니.”
화를 내면서도 전단지에 눈을 돌린 이나코는 문득 뒷면에 뭔가 쓰여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전기목록’……?”
그 단어와 함께 뒷면에는 ‘야불지’나 ‘전포’같은 문자와 설명문이 휘갈겨 쓰여있었고 도면처럼 보이는 것도 그려져 있었다. 곳곳에 빗금으로 지워진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무언가를 기억해내기 위해 적은 것 같았다. 냉큼 받아도 됐던 물건일까 궁금했지만, 이제는 다시 돌려줄 수도 없게 됐다는 생각에 이나코는 떠오르는 궁금증을 접고 전단지를 집어넣었다.
***
이나리 산사에서 나와 남쪽으로 내려와서 후지노모리 근처까지 오자 유곽[8] 입구에 접어들게 됐다.
이 유곽은 기온과 시마바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작은 규모였지만 주신구라에 나오는 오이시 구라노스케[9]가 들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낮에는 한산한 것이 정상인데도 오늘은 활기찬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동포를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전쟁일지니―”
“구세군이 와있었구나.”
‘구세군’이라고 수놓은 감색 군모와 군복을 입은 무리가 창가(娼家)가 늘어선 거리를 행진하면서, 나팔과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구세군가인 ‘이것은 동포를’을 부르고 있었다.
메이지 5년(1872년)에 유녀 해방령이 떨어진 이후로 인신매매는 금지됐지만 궁핍하거나 일거리가 없어 유곽에 몸을 파는 여성은 아직도 많이 존재했다.
그러한 폐창운동, 즉 성매매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개신교인으로 구성된 구세군이었다.
‘군’이라는 명칭이 붙기는 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언제나 평화적이었다. 지금도 ‘야전’이라고 불리는 길거리 전도 활동을 한참 벌이던 중이었는데, 길을 가던 사람들에게 기관지와 전단지 등으로 만든 ‘총탄’을 ‘발사’한다는 식이었다.
행렬의 맨 앞에서 낯익은 모습을 본 이나코가 뒤쫓아가려고 하던 그때, 굵고 거친 목소리로 ‘이 자식들 지금 뭐하는 거냐―’하고 소리치는 대머리 남자가 행렬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나코는 황급히 처마 밑에 쌓여있던 나무통 뒤에 몸을 숨겼다.
“네 놈들은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사람이 장사하는 걸 방해하는 거냐, 엉?”
“우리들은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는 여성을 구제하기 위해 왔다.”
앞장선 남자는 서양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더 크고 건장해보였다.
“당신들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람이 되지 못해. 어서 눈을 떠야 한다.”
“눈은 진작에 떴다. 맨날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놈들이…….”
“매춘부가 일을 자진해서 그만두는 것은 법률로 보호받고 있고, 그걸 막으려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오면 사회 복귀 훈련을 받게 해주겠다.”
돌연히 열린 2층 창문에서 재떨이가 날아와 구세군 남자의 정수리를 직격했다. 군모가 벗겨지면서 짧게 자른 머리가 드러났지만 그는 아픈 기색도 없이 2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구가 씨였구나.”
이 거구의 남자는 이나리와도 잘 아는 사이였던 구가 겐고였다. 구가가 군복에 묻은 담뱃재를 털어내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웃음 소리가 들리면서 다른 남자들이 창가에서 몰려나와 순식간에 대열을 갖췄다.
‘덤벼라’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구세군을 덮쳤고 유곽은 소동에 빠졌다.
흙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구세군을 향해 남자 여럿이 달라붙어 마구잡이로 때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구가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라!’라고 끈질기게 외치고 있었다.
그 사이 구가를 찾으려고 하던 이나코는 방금 전 대머리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나코는 마치 뱀과 마주친 개구리처럼 몸이 움츠러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곧바로 대머리 남자가 다가와 ‘이 놈들과 한패인가’라고 말하며 난폭하게 손목을 잡아끌었다. 구가가 작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이나코를 알아채곤 소리치던 것을 그만뒀다.
얼빠진 모습이었던 구가는 상황이 파악되자마자 얼굴을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물들였다.
부동명왕의 모습 그 자체가 된 구가가 그들의 팔을 잡고서 그대로 가볍게 던져버렸다.
머리 위를 날아가는 동료를 본 무리가 주춤했다. 구가는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달려들어 단번에 쫓아내버리고는 이나코에게 달려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대머리 남자의 멱살을 한손으로 잡아올렸다.
구가는 힘이 다 빠져 땅에 주저앉아 있던 이나코에게 지극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구나. 거기 얌전히 있거라.”
구가가 손을 놓자 대머리 남자는 쌓여 있던 나무통에 거꾸로 떨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부서진 나무통 밑에 깔리고 말았다.
또 다시 어딘가로 달려간 구가는 동료들을 공격하는 무리의 목덜미를 하나씩 잡아서 내던지고는 몸에 달라붙은 이들을 기관차처럼 끌어 당기면서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녔다.
“육증기[10]‘라는 별명이 딱 맞네.”
러일전쟁 당시 구가는 남산, 봉천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무공을 세웠었다. 적군의 맥심 기관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맹돌진하던 모습을 두고 구가라는 이름의 한자 ‘육(陸)’을 따와 ‘육증기’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제 이 유곽에서 구가를 저지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듯 했고 습격했던 무리는 마치 거미 새끼가 흩어지듯 창가 안으로 쫓겨 달아났다. 드디어 숨을 돌린 구가는 동료들과 짧은 말을 나눴고, 구세군은 대열을 정비한 다음 구가를 남기고 유곽에서 떠나갔다.
“이나코 양, 어디 다친 데는 없나?”
구세군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구가는 군모를 다시 쓰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군복을 툭툭 털면서 다가왔다. 방금 전 분노에 가득찼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평소와 같은 가벼운 표졍으로 돌아와 있었다.
“구가 씨 덕분에 무사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여기 서서 얘기하는 것도 뭐하니 일단 다른 곳으로 가자.”
이나코는 구가에게 의지하며 유곽을 빠져나왔다. 남쪽으로 계속 나아가 먹 빛깔의 인클라인[11] 위를 지나는 육교에 올라서자 마침 두 사람의 발밑으로 케이블이 차량에 실린 배 한쌍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까 머리에 재떨이를 맞으셨는데 괜찮으세요?”
“그건 괜찮았지만, 그 다음이 실수였어.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올바른 전도의 모습이 아니야.”
“그래도 덕분에 저는 무사한 걸요.”
“잘 모르겠다. 앞뒤를 생각하지 못하고 폭주하고 마는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니까.”
“맞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집에 들렀다 가세요. 사례하고 싶어요.”
이나코가 묻자 구가는 ‘아니 그건…….’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언니도 집에 있을 거예요.”
“있으니까 더 곤란한 건데.”
구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이나코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사양 마세요. 언니가 끓인 맛있는 차라도 같이 마시고 가요.”
구가는 간신히 표정을 풀고,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는 이나코를 마지못해 따라갔다.

[1] 본사에 부속된 신사
[2] 신의 이름을 새겨서 신앙의 대상이 된 비석
[3] 신이 진좌하였다고 알려진 장소
[4]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교토 시 노면전차를 운행한 회사인 ‘교토 전기 철도’를 이른다.
[5] 메뚜기가 이나코와 비슷한 발음임을 이용한 말장난
[6] 교토에 있는 신사. 현재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 이름이 바뀌었다.
[7] 일본 전통 과자의 일종
[8] 많은 창녀를 두고 매음 영업을 하는 집, 또는 그런 집이 모여 있는 곳
[9] 주신구라(忠臣蔵)는 에도 시대에 아코 번 낭사들이 기라 요시나카와 기라 가문을 호위하는 무사를 집단 살해한 사건인 ‘아코 사건’을 소재로 만든 극작품들을 말한다. 이 사건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内蔵助)이다.
[10] 일본에서 기차를 부르던 옛 이름
[11] 급한 경사로 인해 배가 오를 수 없는 구간에 설치한 선박 운송용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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