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기목록 – 제2장 (3)

그날 오후. 이나코는 보자기에 싼 양풍기를 손에 들고 전차에 올라타 가와라마치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이 주변에 온 것은 어렸을 적 호코지의 대불을 참배했던 이후 처음이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중 갑자기 지붕과 벽돌로 된 서양식 건물이 튀어나오자 놀라고 말았다. 옆에 있던 한 부인의 말을 들어보면 올해 세워진 성 요한 성당이라는 건물이라는데, 크게 더러운 부분도 없이 장엄하게 서 있는 모습에 이나코는 무심코 합장을 하고 있었다.

 

다카세 강 기슭에 푸른 버드나무가 늘어선 기야마치 거리를 지나, 시죠코 다리 정류장에서 멈춰선 전차를 내리자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시죠 거리가 나왔다. 그 좁은 길목에서 서쪽으로 걸어가자 마침내 신쿄고쿠 거리에 도착했다.
메이지 초에 만들어진 신쿄고쿠 거리는 교토에서 가장 번성하는 동네였다. 모자 장수, 나막신 장수 등 여러 가게와 극장이 늘어서있는 거리에는 하녀를 데리고 나온 마님이나 머리가 벗겨진 노인, 학생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돌아다니면서 여름의 아찔한 햇볕을 피하기 위한 부채로 얼굴을 부지런히 부치고 있었다.
찻집은 하나같이 ‘얼음 판매’라는 간판을 걸어두고 있었다. 가게 앞 식탁 의자에 앉아 설탕을 뿌린 얼음이나 레모네이드를 맛보는 공장 노동자들, 고마치쿠레나이[1] 가게에서 꺄르륵 소리를 내는 아가씨들을 곁눈질하면서 이나코는 전단지에 쓰인 주소 주변까지 찾아왔지만 그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 주변일 텐데.”
그렇게 우왕좌왕하던 사이 지나가던 소년과 부딪히고 말았다. 상대가 넘어지는 순간 등에 지고 있던 바구니에서 대량의 지팡이가 땅에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실수였어요.”
“아뇨 괜찮아요. 이렇게 예쁜 분이랑 부딪히다니 오히려 기쁜 걸요.”
옷자락을 허리춤까지 걷어 올리고 ‘야구라 죽근 회초리 가공점’이라고 옷깃에 쓰여 있는 겉옷을 입은 소년은 재치있는 대답과 함께 일어나 얼룩이 가득한 얼굴로 쾌활하게 웃었다.
뭔가 키하치를 작게 만들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나코는 지팡이를 주워서 돌려줬다. 그러자 소년은 전단지를 보고는 ‘어라’하는 소리를 냈다.
“누나 혹시 호라이 불구점을 찾고 있는 거야?”
“어? 아, 응, 그런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그럼 내가 안내해줄게. 마침 들릴 생각이었거든.”
소년은 이나코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앞장을 섰다. 이나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 조그만 뒷모습을 따라가기로 했다.
“너도 사카모토하고 아는 사이니?”
“난 야구라 야지로. 누나는 키하치 형한테 볼일이 있는 거야?”
“응. 양풍기를 고쳐달라고 하려고.”
“기계 수리구나, 형이 좋아하겠다. 봐봐, 저기야.”
호라이 불구점은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는 입구를 들어서자 어스레한 가게 안에 양초와 향, 염주 등 불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야지로는 안쪽에 대고 ‘실례합니다, 야구로예요’라고 외쳤다.
“형, 손님을 데려왔어. 그, 이름이…….”
이쪽을 돌아보는 소년에게 ‘모모카와 이나코’라고 이름을 알려줬다.
“모모카와 콩가루[2] 씨래.”
“이나코!”
그 말과 동시에 흙바닥 너머로 누군가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야지로, 물건 팔고 돌아가는 길이야?”
웃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보인 건 그때처럼 자신만만한 웃음기를 품은 키하치였다.
“손님한테 상품 견본을 보여주려고 갔어.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콩가루 씨를 만났는데…….”
거기서 야지로와 키하치는 몇 마디 더 나누고는 “그럼 다음 야학회에서 봐”라고 말하며 기운차게 헤어졌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 메뚜기 씨.”
곧장 정강이를 걷어채인 키하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다짜고짜 무슨 짓이야”하고 항의하는 키하치를 보고 이나코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엉터리 번호를 잘도 줬구나. 덕분에 험한 꼴을 당했어.”
“엉터리라고?”
키하치가 고개를 갸웃할 때 옆집에서 전화가 큰 소리로 울렸다.
잠시 후 누군가 전화를 받고 종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분시치 있는가!”
갑자기 백발의 영감님이 화를 내며 가게로 들어왔다.
가게 안쪽에서 ‘음어’하고 잠이 덜깬 목소리와 함께, 상호가 적힌 옷을 걸쳐 입은 중년의 안경 쓴 남자가 뜬 머리를 가라앉히면서 나왔다. 머리에서 비듬을 떨어뜨리고 있는 이 남자가 아마 분시치인 것 같았다.
“아, 포목전 사장님,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같은 소리하네. 우리 집에 또 자네 편으로 전화가 걸려왔네.”
“항상 고맙지요. 그래서, 그쪽 분이 뭐라고 하덥니까?”
“냉큼 끊어버렸네! 빨리 전단지에 전화번호 지우지 못하겠나?”
포목전 주인과 분시치의 대화를 보면서 키하치에게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었다.
“전화번호가 적혀있으면 손님들의 신용도가 완전 달라져. 하지만 우리가 연간 계약료를 낼 돈은 없으니까 숙부가 옆집 포목점 번호를 그냥 빌려쓰고 있어.”
키하치가 진저리치는 한편, 분시치는 주눅드는 기색도 없이 포목전 주인을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성낼 일 없잖습니까. 빌리는 만큼 그 값은 쳐드리고 있으니.”
“그럼 민폐 요금도 낼 겐가? 자네 편으로 전화가 자꾸 오잖나.”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이나코가 키하치 귀에 속삭였다.
“저 포목전 주인, 전화를 몇 번이고 받다니 배짱이 있구나. 나는 전화가 무서워.”
“뭐야, 교환수하고 얘기하는 게 긴장되는 거야?”
“상대가 콜레라에 걸려있으면 어떻게 해. 전화로 옮는다고 들었는 걸.”
“그럴 리가 있겠냐.”
‘너는 대체 몇 십 년 전 사람인거니.’ 키하치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는 사이 분시치가 “자자, 손님 앞에서 뭐하니까”라며, 분노가 가시지 않은 포목전 주인을 안쪽으로 데려갔다.
“괜찮아? 저대로 놔둬도?”
“상관 없어. 저 포목전 주인님도 입이 근질근질해서 전화가 잘못 걸려왔다는 걸 핑계로 수다 떨려고 오는 거야.”
정말인지 미심쩍어하어 하면서, 팔짱을 끼고 있던 키하치와 눈이 마주쳤다.
키하치는 금새 눈을 돌리고는 “……아무튼, 미안해”라고 우물우물 말했다.
“전단지 줄 때 전화번호 얘기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네.”
“이제 됐어. 이렇게 직접 와서 보고 가게는 정말로 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걸 믿고서 여기까지 왔던 거야?”
“믿는 게 내 장점이니까.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서든 고쳐줬으면 했어.”
보자기에서 양풍기를 꺼내자 키하치는 “양풍기구나”라고 잡아먹을 듯 얼굴을 들이댔다.
“떨어뜨렸더니 움직이지가 않아. 그리고 이건 선불.”
“오, 비스킷. 게다가 고급스러워.”
선반에 있던 접객용 과자를 조금 가져왔었다. 이나코에게 꾸러미를 받아든 키하치는 재빨리 한 장을 집고는 앞니로 깨작깨작 갉아먹기 시작했다.
“어쩌면 금방 고칠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잠깐 기다려 줄래?”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에 이나코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괘종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였다. 키하치는 주변에 있던 작업대에 양풍기를 올려놓고 재빨리 분해하기 시작했다. 작업대 위에는 갖은 종류의 탁상 시계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부품이 놓여져 있었다.
다른 불구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물건들을 보고 있으려니 키하치가 “다 됐어”라고 말했다.
“어, 벌써 고쳤어?”
“전기를 쓰지 않는 기계 따윈 식은 죽 먹기지. 그냥 톱니바퀴가 빠져있었을 뿐이었어.”
대단한 작업 속도에 경탄하는 이나코의 눈 앞에서 키하치가 태엽을 감자 양풍기는 부채를 쾌활하게 움직이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미적지근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우와, 고마워.”
이나코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키하치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고쳐서 겨우 이 힘없이 미적지근한 바람이 부는 걸 보면 마냥 기쁘지는 않네.”
이나코가 양풍기를 보자기에 싸는 사이, 아까와 같은 종소리가 다시 날카롭게 울렸다.
“마침 잘 됐다. 봐, 차가 끓여졌다고.”
키하치가 작업대에 놓인 기계를 손으로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작업대를 봤지만, 기계에 붙들린 주전자가 자기 혼자 찻주전자에 끓는 물을 부어넣는 모습에 이나코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놀랐지? 영국제 자동 티 메이커를 베껴서 만들어봤어. 자명종을 맞춰놓은 것처럼 작동하면서 시간이 되면 물 끓이는 용도의 알콜 램프에 불이 붙고, 그 다음엔 꼭두각시 인형하고 같은 방식으로 끓인 물을 찻잎이 들어있는 찻주전자에 부어주는 거야.”
키하치는 찻주전자를 들어 준비된 찻잔에 차를 따르고 이나코에게 건넸다. 노리코의 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키하치는 다과용으로 비스킷을 하나 줬다.
“여기 불구점 맞지?”
“주로 파는 건 그렇지. 단순한 기계 수리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수리해달라는 주문도 받고, 재료비만 준다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기도 해.”
“혹시 이 자명종 차도 파는 물건이야?”
키하치가 비스킷으로 볼이 빵빵한 채로 끄덕이자 이나코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납품 전에는 뭐든 시험 작동 시켜보는 법이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나코는 작업대에 있는 기계에 둘러봤다.
“다른 자명종도 있어? 늦잠자지 못하게 해주는 게 있으면 하나 사볼까.”
“여러가지 있어. 내가 약간 손을 본 시제품도 있는데, 눈이 번쩍 뜨이지.”
시제품이라는 소리에 이나코는 “아, 그러고보니”라고 말하며 가져온 전단지를 키하치에게 보여줬다.
“이 전단지 뒤에 ‘전기목록’이라고 쓰여있는데, 혹시 중요한 종이였어?”
방금까지 희희낙락했던 키하치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차, 필기장 대신 쓰던 전단지를 잘못 줬구나.”
“혹시 상품 제작법이라든지 그런 거라면 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딱히 돌려주지 않아도 돼. 옛날에 고안했던 예언 속 기계를 심심해서 설계해봤을 뿐이야.”
“예언?”
“앞으로 백년 동안 전기가 실현해줄 것을 스무 개 써놓은 ‘전기목록’이라는 책이야.”
부끄럽다는 듯 수줍어하는 키하치를 보니 약간 장난기가 동했다.
“다른 예언도 있겠구나. 그 책 좀 보여줄래?”
어렸을 적 낙서는 누구라도 보여주기 부끄러운 법이다.
“……옛날 얘기야. 진작에 잃어버리고 말았어.”
쓴 웃음을 짓는 키하치를 두고 “그렇구나”라고 낙심하면서 이나코는 찻잔에 남은 차갑게 식은 차를 마셨다.
“놀림거리가 사라졌나보네, 미안.”
“그, 그런 생각, 딱히 하진 않았어.”
의도를 딱 들키는 바람에 움찔했다. 그렇게 비스킷을 깨물어먹으면서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가게 안쪽에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키하치의 말대로, 화가 가라앉은 포목전 주인은 분시치와의 수다에 열중인 듯 했다. 문득 벽 시계를 보니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돌아가야겠다.”
키하치가 근처 교덴 정류장까지 바래다준다고 하기에 둘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노을에 물드는 신쿄고쿠 거리를 걷고 터덜터덜 언덕을 올라, 벽돌로 지어진 우체국 등의 건물이 늘어선 것으로 유명한 산죠 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저녁볕이 비추는 야베토쿠 시계점[3]을 흘끗 보면서 이나코는 키하치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사카모토는 나중에 기계 관련 일을 하고 싶은 거야?”
“기계라기보다는 전기야. 대학에서 공부를 한 다음 전기회사나 전자제품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 웬만하면 ‘일본의 에디슨’이 계신 회사면 좋겠지.”
니조에서 이화학(理化學) 기기 제조업을 운영하며 ‘일본의 에디슨’이라고 불리우는 그 인물은 상당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으로, 키하치와 비슷한 나이에 삽화 한 장만 보고서 서양의 발전기를 똑같이 만들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이후 그는 국산 축전지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렇게 생산된 축전지는 해군의 신형 무전기에도 사용돼 쓰시마 해전[4]에서 연합 함대가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할 때에도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 제작소에서는 지금 의료용 엑스 광선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어.”
알아듣기 어려운 키하치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걷다보니 정면에 동그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단 성 자비에르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나코는 반사적으로 새하얀 성당을 향해 손을 모았다.
말이 끊어진 탓인지 키하치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넌 예수도 믿고 있니?”
“아니. 그냥 예수님은 대단한 신이라잖아. 구가 씨라는 분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앓던 사람도 치료해주고 죽어서도 부활한 사람이래. 빌어놓으면 무슨 복이든 받겠지.”
“더욱 더 수상한 얘기네. 문명국에 사는 서양인이 어째서 저런 허풍을 믿고 있는 걸까?”
“사카모토는 절에서 태어났잖아. 남이 믿는다는데 실례되는 말을 잘도 하는구나.”
“절에서 태어났으니까 더 잘 아는 거야. 알아듣지도 못할 경을 외면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에 돈을 받는 주지의 모습을 옆에서 봐왔어. 지옥이니 천벌이니 하는 말로 신자를 위협해서 돈을 버는게 종교인 걸.”
성당을 올려다보는 키하치는 언젠가 오쓰카 앞에서 본 적 있던, 한이 서린 눈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신불같은 헛소리를 믿는 시대는 끝났어. 엑스 광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준 것처럼, 이제는 전기가 기적이니 숭배라느니 하는 그 정체를 폭로해줄 거야.”
신을 폭로한다. 그 한 마디에 이나코는 가슴 속 어딘가에서 욱신거림을 느꼈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신 대신 전기가 기계를 움직여서 사람과 세상을 풍족하게 해줄 거야.”
키하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가득찬 얼굴로 소리 높여 말했다.
“20세기는 전기의 세기가 될 테니까.”
“……신을 대신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찬 물이 끼얹어질 것이라곤 생각치도 못했는지 키하치는 얼빠진 표정이었다.
“신은 계셔. 우리 엄마가 그랬어. 술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아주 많이 있다고. 대충 하다간 신께서 술을 망치지만 온 정성을 다해 만들면 술의 신께서 도와주셔서 맛을 좋게 해준다고. 아무리 전기의 힘이라도 신을 대신해 줄 수는――”
“바보같아.”
이나코의 주장은 키하치의 차디 찬 한 마디에 멈추고 말았다.
“이젠 전기 현미경으로 아주 작은 것도 볼 수 있게 됐어. 그걸 쓰면 신이 뭔지 그 정체를 알게 되겠지. 20세기는 말야, 장인의 기술이라든지 전통같이 비효율적인 것 대신 술을 빚는 일도 전기로 하는 시대야. 신 따위에게 빌지 않아도 맛 좋은 술이 만들어진다고.”
이나코는 주조장 일을 비웃었던 요스케의 얼굴이 떠오르자 빠르게 초조해졌다.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술’이라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해. 사기꾼이 선전하는 말 같아.”
그리곤 키하치는 도발하듯 코웃음쳤다.
“메뚜기 씨네 엄마가 사기꾼이었나 보네.”
 솟아오르던 초조함에 부글부글 끓던 머릿속이 점점 한계에 이르렀다.
“있든 없든 상관 없는 건 전기잖아!”
“……뭐라고?”
“전기의 시대는 무슨 전기의 시대야. 축음기도 시계도 태엽으로 돌아가고, 가게엔 전등도 안 켜지고. 지금같은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기로 살고 있는데? 불빛은 등불로 충분하고, 전차보다 기차가 더 빨라. 가스만 있으면 물도 끓일 수 있어. 전기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잖아.”
할 말이 가득해보이는 키하치를 두고 이번엔 이나코가 코웃음을 쳤다.
“전기에 심취해있는 사카모토의 모습, 완전 웃겨. 자기가 싫어한다는 그 스님들하고 지금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잖아.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전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순식간에 키하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며 꽉 쥔 주먹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기목록도 분명 사기꾼이 쓴 예언서겠지.”
땡땡 하고 맥빠지는 종 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드니 교덴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됐어, 돌아가.”
낮은 목소리로 키하치가 조용히 말했다. 이나코는 키하치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움직이는 전차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은 이나코는 고개를 떨군 채 양풍기에 힘없이 이마를 기댔다.

[1] 에도 시대의 고급 립스틱 상표명
[2] 콩가루(키나코)와 이나코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
[3] 교토에서 외국 물품을 취급하던 상가로, 일부를 서양식으로 개장한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4] 러일전쟁 당시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해전. 이 해전에서 일본 제국의 연합함대는 러시아 발트 함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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